이달 초 전남 강진을 여행하는 길에 이 지역을 대표하는 시인인 영랑 김윤식의 생가에 들렀다. 집은 비록 초옥이나 안채와 사랑의 규모, 집을 품고 있는 대숲의 정취 등 한눈에 봐도 부농의 인상이 역력하다. 영랑은 이곳에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비롯해 시 60여편을 썼다.
1948년 영랑이 서울로 거처를 옮긴 후 집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다 1985년 강진군이 매입해 보존 관리해 오고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252호다. 방문 시점엔 사랑채 보존 공사가 한창이었다. 집 주변 길은 ‘영랑생가길’로 명명되었고 길 너머에는 자그마한 식물원인 ‘사계절모란원’과 세계모란공원이 조성돼 있다. 겨울인데도 가족 단위 방문객이 상당하다. 모란이 필 즈음엔 아마도 미어터질 것이다.
그 하루 전 전북 고창의 미당 서정주 생가에 갔을 땐 쓸쓸함을 넘어 방치된 느낌을 받았다. 본채와 헛간으로 쓰였을 아래채, 두 초가는 관리를 받아본지 수년은 되었을 모양을 하고 있다. 자물쇠를 걸어둔 방안 틈새로 먼지 쌓인 냉장고 같은 것이 보인다. 고물을 치우지 않고 그냥 둔 듯하다. 관람객이라고는 나뿐이어서 뒤란에 퍼질러 앉아 쉬었다. 물론 안될 일이지만 담배를 피워물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 어느 광인이 불이라도 놓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든다.
미당은 한국어의 구현에서 신화와도 같은 업적을 남겼다. 그가 태어난 이곳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는 그 신화가 잉태된 그야말로 신화적 공간이다. 미당은 무슨 바탕을 타고나 어떤 자극을 받았길래 그런 절창을 누에고치처럼 뽑아내었는가. 폐가 분위기의 뒤란에 앉아 이런 공상을 하는 것이 정취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미당의 자취를 더듬을 어떤 단서도 없다.
생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에는 미당의 육필 원고, 운보 김기창이 그린 초상화 등 2300여편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관리 주체가 미당의 직장이었던 동국대학교다. 생가에 비해 비교적 알뜰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문학관 한층은 서정주의 친일 부역 작품으로만 꾸려졌다. 미당은 영욕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다. 영욕을 두루 보여주는데 기념관의 의의가 있을 수도 있겠다. 부역 작품 몇편을 서서 대충 읽으니 과연 볼만하지는 않다. 미당이라는 천재도 프로파간다 속에서는 빛이 바랜다. 영혼을 깃들이지 않은 작품에서 발휘된 천재를 본 일이 있는가.
국정교과서로 배운 내 세대에 미당은 ‘국민 시인’과도 같았다. 현직 국어 교사에게 물어보니 검정교과서 체제에서 미당의 작품을 수록한 교과서를 보기 힘들다고 한다. 세대에 따라 문학도, 교과서도 다시 쓰이는 것이 이치다. 그러나 김소월 백석 한용운 윤동주 이상화 등 미당과 동시대 혹은 선배 축에 들어가는 시인들의 작품은 여전히 수록된다고 하니 시대 유행의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방치되다시피 한 미당의 생가, 교과서에서 밀려난 그의 작품…. 그 배경엔 친일 논란이 있다.
미당의 친일 행적은 감춰진 적이 없고 본인은 여러 번 참회했다. 그럼에도 생전에 ‘시의 정부(政府)’란 칭송까지 들으며 국민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압도적 문학적 재능 때문이었다. 나는 일개 시 소비자로서 시인의 능력을 평가할 능력이 없지만 미당의 작품을 일람하다 보면 그가 만지면 다 시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만지면 다 음악이 됐던 모차르트처럼 말이다. 심지어 시와 산문의 경계조차 모호해서 미당의 산문을 읽다 보면 세상에 없는 장르를 보는 것 같다. 여러모로 독보적인 천재성이다.
1975년 5월18일 그의 회갑연에서 미당이 만취해 말했다. ‘보들레르가 현재의 한국에 태어나 내가 받는 만큼의 대접을 받았더라면 일생 받은 너무나 적은 원고료를 더해보며 그렇게 처참하게 통곡하지는 않았을텐데...’ 미당이라고 살림살이가 크게 넉넉하였을 리 없지만 그에겐 명성과 존경, 문단 권력, 천석의 술을 마실 건강과 쌈짓돈이 있었으니 다복하게 살다 간 셈이다.
미당의 친일이 본격 시험대에 오른 것은 그의 사후 고은 등 민족주의 문학을 지향하는 몇몇 시인들이 비판을 제기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면서 교과서에서 그의 작품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 청소년들과 20~30대 중에서는 미당과 ‘국화 옆에서’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비중이 상당하다고 한다. 한 세대 만에 한국 시의 헤게모니가 바뀌었다. 한때 시의 황제로 군림했던 미당은 폐위된 후 폐교를 리모델링한 기념관에 위리안치되고 그 생가는 폐가처럼 쓸쓸하다.
감수성 예민한 시절에 미당의 시를 읽은 사람으로서 그 절창에 마음을 빼앗긴 한국인이 급격히 감소하는 현실은 서글프다. 교과서에는 정치적으로 깨끗한 인물만 실리고 있다. 그런데 문학이 어디 그런가. 문학이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상기 남은 애상으로만 충분하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그때가 그립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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