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없는 책일수록 저자가 혼자 떠드는 형태로, 전엔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이 전혀 없었던 듯이 서술돼 있다. 나쁜 책을 읽고 싶지 않다면, 인용이 없거나 주가 없거나 참고문헌이 없는 책부터 거르면 된다. 설사 인공지능(AI) 같은 새로운 분야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아이작 뉴턴이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도 예외일 수 없다. 좋은 문학작품은 반드시 선배들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담고 있다. 불쑥 튀어나온 작품은 없다. 한 작가가 쓰는 단어나 문장, 은유나 상징은 모두 그가 읽었거나 공부했던 작품 속에 축적된 역사적 맥락을 반영한다. "엄마가 4월 7일 월요일에 죽었다. (중략) 10시쯤이었다."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를 기리는 작품 '한 여자'의 첫 문장을 이렇게 쓴다. 이 건조한 문장은 절로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한 걸작을 떠올리게 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다. 오만한 작가는 자신의 독창성을 자랑하나, 현명한 작가는 과거의 작품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슬쩍 비틀어 쓴다. 에르노는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선배의 현대적 문장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 후, 그 건조함으로부터 다른 길로 나아간다. 카뮈가 부조리한 세계에 직면한 한 남성의 무감각과 소외의식을 그려냈다면, 에르노는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평생 신분 상승을 위해 애쓴 어머니의 삶에 대한 사회적 보고서를 작성한다.
흥미로운 것은 딸의 글과 함께 어머니의 일생, 그 말씨와 행동이 20세기 후반 프랑스 노동자 계급 여성의 대명사로 점차 변화한다는 점이다. 한 여자의 삶이면서 모든 여자의 삶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에르노는 진정한 애도란 감정 과잉의 슬픔과 빤한 위로로 점철된 감상주의가 아니라 그 너머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즉 엄마의 일생을 개체의 삶에 가두지 않고 보편의 서사로 고쳐 쓰는 데 있음을 알려준다.
좋은 글은 선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의 삶에 맞게 고쳐 쓸 때 존재한다. '생각의 진화'에서 독일 작가 미하엘 슈미트살로몬은 말했다. "한 명의 창작자만 있는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부지런히 읽어야 하는 이유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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