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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그리 외쳐도 삶은 그대로”…독재에 맞선 청년, 독재자 됐다 [Book]

헝가리 자유선거 이끈 오르반
25년 뒤 총리 올라 ‘철권 통치’

노벨경제상 수상 애쓰모글루
“좋은 일자리가 민주주의 열쇠”
198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광장에서 26세의 청년 정치인 오르반 빅토르의 연설은 자유민주주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훗날 총리에 오른 그는 이날 자신의 연설과 배치는 듯한 언행을 보인다.
198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광장에서 26세의 청년 정치인 오르반 빅토르의 연설은 자유민주주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훗날 총리에 오른 그는 이날 자신의 연설과 배치는 듯한 언행을 보인다.

198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광장에 26세의 유력 정치인이 연단에 섰다. 훗날 총리직에 오르게 되는 그의 이름은 오르반 빅토르, 피데스당(청년민주동맹)의 지도자급 인사였다.

그날 그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을 믿는다면, 공산 독재를 종식할 수 있다. 집권당이 자유로운 선거에 복종하게 만들 수 있다.” 이날 행사는 동지들의 유해를 재매장하는 성대한 장례식이었고, 그의 말은 자유선거 실시를 넘어 소련군의 헝가리 철수를 통한 ‘민주정 수립’이란 목표로 귀결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2014년 집권과 패배를 거쳐 재집권한 ‘총리’ 오르반의 언행은 25년 전의 자신을 배반하고 있었다. 서구 스타일의 복지국가가 아닌 “노동 기반의 사회 건설”이란 말이 대표적이었고, “비자유주의 국가”란 말까지 나왔다. 오르반은 대학과 언론사의 문을 닫게 만들었고, 행정부 권력 유지를 위해 발언의 자유를 억눌렀다. 그는 과거의 자기 자신과 싸우는 듯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광장 연설 당시. [Wikimedia Commons]
헝가리 부다페스트 광장 연설 당시. [Wikimedia Commons]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런 애쓰모글루는 신간 ‘자유민주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서 오르반의 두 얼굴을 보여주는 서문으로 책을 연다. 애쓰모글루는 오르반의 ‘변신’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증언했던 위대한 인물들이 왜 자유민주주의를 후퇴하게 만들었는가의 문제를 파고드는데, 그에 따르면 이는 몇몇 인물이나 몇몇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의 전환기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1991년 소비에트연합이 해체됐다. 이제 인류가 나아갈 역사의 나침반은 오직 자유민주주의를 가리키는 듯했다. 자유민주주의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20세기의 경쟁자를 차례대로 패망시켰고,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자유를 가져올 최종 답안지로 수용됐다. 왜 그런가. 자유민주주의가 세 가지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첫째, 자유민주주의는 공동의 번영을 약속했다. 민주정은 ‘고른 분배’로서의 공유를 뜻하는 약속으로 세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민주정은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기반이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경제적 번영의 희망을 허락했다. 둘째, 민주정은 ‘제대로 된 하수구’로 은유되는 공공서비스 확보 역시 시민들에게 허용할 것으로 보였다. 과거 비민주적 정부들은 보건, 교육, 도로를 외면했고 삶의 질은 악화됐다. 모두의 합의에 기초하는 민주정은 “당신의 삶은 개선될 것이고, 개선의 과정에 당신도 참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셋째, 자유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참여의 보장이란 미래를 추동했다. 모두의 ‘목소리’가 질서의 기초가 된 것이다. 정치적 참여의 증대는 시민을 통치 대상이 아닌 주체로 끌어올렸다.

가끔 탈선하는 국가가 있긴 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은 적어도 서구 국가에선 대개 실현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2000년대 즈음부터 자유민주주의가 내건 약속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쓴다. 먼저 흔들린 건 공동의 번영이었다. 육체 노동자와 비대졸 노동자의 임금이 정체되는 사이, 전문직·경영직·기술직이 챙기는 보수는 가파르게 올랐다. 책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상위 1% 가구의 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 10%였지만 2019년엔 19%로 뛰었다. 소득이 아닌 ‘부’를 기준으로 삼으면 상위 1%의 비중은 35%로 늘었다.

공공서비스 분야는 피부에 와 닿을 만큼 믿음을 잃어버렸다. 가령 미국 의료시스템은 실패의 독보적인 상징으로 남았다. 미국인들은 프랑스, 영국, 일본보다 3배의 의료비를 쓰면서도 기대수명은 더 짧다. 특히 저자는 MIT 인근 롱펠로 다리 보수공사를 사례로 드는데 계획과 승인에만 4년, 실제 공사까지 5년, 도합 9년이 걸렸다고 한다. 중국에선 롱펠로 다리의 20배 길이인 대교 건설에 고작 4년이 걸렸다. 또 미국인 유권자의 85%가 “선출직 공직자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에 관심이 없다”고 느낀다. 시민들의 ‘목소리’도 공허하게 울려 퍼지고, 자유민주주의는 세 가지 약속을 모두 배반했다고 책은 질타한다.

애쓰모글루는 탈산업화를 그 이유로 꼽는다. 산업 시대엔 공동의 번영이 실현됐다. 노동 수요가 증가하니 임금이 올랐고 성장의 과실은 노동자들도 가져갈 수 있었다. 두툼해진 지갑은 상품의 수요도 키웠다. 경제 성장은 세수를 늘려 인프라스트럭처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이었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과 자동화로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생산성과 임금이 상승해도 저학력 노동자들은 기회가 줄어들었다.

또 이 책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규제’에 관한 진단이다. 과거에 비해 대졸자 수가 크게 늘었다. 이들 모두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로펌 변호사처럼 고소득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규제와 규범’의 설정엔 공감대를 형성했다. 규범을 늘리면 더 큰 지위와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규제가 많을수록 좋다”고 믿게 됐다. 규제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문가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남겨졌다. 실제 삶을 개선하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가르치는 정치’가 보편화됐다.

알고리즘은 공동체가 개인을 통제하는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공동체의 권력은 폭력이나 위협에서도 나오지만, 일상에선 집단 속 동료의 압력이나 배척에서 더 자주 표면화된다. 알고리즘 시대에선 공동체가 온라인으로 옮겨갔는데, 규범을 내면화한 동료 집단은 대상을 축출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발언의 가능성을 차단하게 된다. ‘목소리’는 다시 힘을 잃는다.

책이 내리는 처방전의 요지는 ‘노동계층 자유주의’의 복원이다. 과거엔 자유민주주의의 적이 독재였지만, 지금 자유민주주의가 당면한 적은 현 체제가 내 삶을 나아지게 하지도, 내 얇은 지갑을 두툼하게 하지도 못하게 만든다는 ‘체념’인 것이다. 노동자에게 좋은 일자리와 임금 상승의 전망을 돌려줘야 한다고, 사람을 밀어내는 디지털 기술에 혜택을 몰아주지 않고 노동자 친화적 기술에 자원을 투입하라고도 책은 말한다. 또 경제권력의 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가는 규모를 제한하고, 시민들에게 “당신의 삶은 더 나아질 것”이란 믿음을 주라고도 경고한다.

사진설명

대런 애쓰모글루 지음, 김승진 옮김, 생각의힘 펴냄



핵심요약 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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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반 빅토르는 1989년 헝가리에서 민주화를 외쳤지만, 현재의 언행은 과거의 자신을 배신하고 있다는批判을 받고 있다.

대런 애쓰모글루는 신간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약속한 공동의 번영과 공공서비스 확보가 실패하고 있으며, 이는 노동 계층의 기회를 줄이는 디지털 기술과 규제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노동계층 자유주의'를 복원해야 하며, 시민들에게 더 나은 삶의 희망을 다시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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