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전세 20년이 던진 역설
출구없는 선의는 덫이었다
포용금융도 의존 되는 순간
국가가 자립사다리 치우는격
시장서 생존할 힘 키워줘야
출구없는 선의는 덫이었다
포용금융도 의존 되는 순간
국가가 자립사다리 치우는격
시장서 생존할 힘 키워줘야
최근 한 지인이 서울 강동구 강일동 아파트 단지의 장기전세 입주민 호소문 사태를 두고 던진 평이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국가의 선의가 국민의 자립 능력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복지가 어느 순간 보호가 아니라 덫으로 변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였다. 사건의 발단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내놓은 장기전세주택(시프트)은 주변 전세 시세보다 저렴한 보증금으로 최장 20년 거주를 보장하는 파격적인 무주택자 복지정책이었다. 강일동 일대에도 대규모로 공급됐다. 그리고 내년부터 약속된 20년의 거주 보장 기간이 순차적으로 끝이 난다.
문제는 퇴거를 앞둔 입주민들이 서울시에 분양 전환이나 전세 연장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그들의 호소는 처절하다. 현재 시세 10억원 안팎의 집에서 보증금 3억원만 받고 나가야 하는데, 이 돈으로는 같은 단지는커녕 인근 지역의 전세조차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백 가구가 동시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면 사회적 충격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호소문에서 기자의 눈을 가장 잔인하게 사로잡은 대목은 "20년간 집 안 사고 뭐 했느냐"는 일각의 냉소에 대한 그들의 답변이었다.
"국가를 믿고 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 한 줄은 어떤 정책 보고서보다 솔직했다. 그리고 어떤 통계보다 섬뜩했다.
원래 시프트는 평생 안주하라고 준 기둥이 아니라, 종잣돈을 모아 시장으로 복귀하라고 놓아준 '사다리'였다. 자립을 잠시 유예해준 장치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가 제공한 온실이 영원할 것이라 착각했다. 온실 밖 사람들이 폭등하는 서울 집값에 올라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정부도 정작 사다리에서 언제 내려와야 하는지, 내려온 뒤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신호를 주지 못했다. 그저 오늘의 불안을 덮기 위해 내일의 비용을 감추기에만 급급했다.
이 실패의 문법은 주택정책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금 대한민국 금융시장에서도 똑같은 리스크가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포용금융'은 이름부터 따뜻하다. 취약계층에게 금융 접근권을 넓혀 주고, 저신용자의 이자 부담을 낮춰주며, 갚기 어려운 빚을 최대한 줄여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금융의 본질은 복지가 아니라 신뢰와 신용이다. 남의 돈은 원래 차가운 법이다. 갚을 수 없는 돈을 빌리게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해외에서 한때 빈곤층 자립의 사다리로 여겨졌던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도 같은 교훈을 던져준다. '가난한 사람도 금융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는 선의의 손길이 결국 수많은 빈곤층을 또 다른 빚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포용금융은 금융약자를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들에게 언젠가는 시장의 청구서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야 한다. 그래야 포용금융으로 인해 다음 세대가 부담해야 할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단순히 돈을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출구를 만들어주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강일동의 항변은 국가의 출구 없는 선의가 국민을 주저앉히는 친절한 '덫'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국가의 진짜 역할은 국민이 시장의 차가운 현실을 잊도록 마취제를 주사하는 것이 아니다. 잠시 숨 돌릴 틈을 주되, 결국은 거친 시장의 바다로 나가 스스로 헤엄칠 수 있는 근육을 길러줘야 한다. 사다리는 올라가라고 놓는 것이다. 평생 그 자리에 주저앉아 기대어 살라고 세워두는 기둥이 아니다.
[손일선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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