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선택권은 허상 됐고
학생에 낙인찍어 자퇴까지
내신 절대평가 못할 바엔
폐지 수준의 대수술 필요
학생에 낙인찍어 자퇴까지
내신 절대평가 못할 바엔
폐지 수준의 대수술 필요
어느 날 위정자들이 그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며 새 제도를 도입한다고 했다. 올해 고1부터 시작된 '고교학점제'다. 자기 적성과 진로에 맞는 과목을 선택해 듣고 학점을 채우면 졸업할 수 있다고 했다. 개설 과목 수도 확 늘렸다.
그러나 애초에 학교를 지옥으로 만든 건 향후 취업 지옥을 면하기 위한 지독한 경쟁이다. 내가 선택한 과목에 나보다 잘하는 학생이 있으면 곤란하다. 나보다 못한 아이들이 많아야 유리하다. 학생들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과목으로 몰린다. 선택은 허상이다.
위정자들도 이렇게 될 걸 모르지는 않았다. 내신 경쟁을 완화하겠다는 '선의'를 발휘했다. 내신 9등급을 5등급으로 바꿨다. 등급 차이를 줄였으니 너무 걱정 말고 진로에 맞는 과목을 고르라고 했다.
그러나 지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선의'로 포장돼 있는 법이다. 서울 하위권 대학의 내신 합격선을 5등급으로 환산해보니 대부분 1등급대다. 학생들은 2등급대만 받아도 서울 소재 대학에 못 간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경쟁이 더 격화될 판이다.
고교학점제는 학습 결손이 심각한 학생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긴다. 과거에는 출석만 채우면 졸업이 가능했지만, 이제부터는 성취율 40% 미만이면 학점을 못 딴다. 졸업을 못 한다.
이들에게도 위정자들은 선의의 손을 내밀었다. 이른바 '최소 성취수준 보장 지도(최성보)'다. 교사들에게 미이수 예상 학생을 파악하라고 했다. 보충 지도를 통해 최소 성취수준을 보장하라고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부터 수학·과학에서 결손이 쌓인 학생의 성취율을 갑자기 끌어올리기란 어렵다. 그래서 편법이 동원된다. 시험을 아주 쉽게 내거나 교사의 주관적 평가가 가능한 수행평가 비중을 늘려 점수를 부풀린다.
더 큰 문제는 '최성보 대상'이라는 낙인이다. 학생 자존감은 무너진다. 주변 시선도 고통스럽다. 끝내 자퇴로 이어진다. 교육부는 내년에야 올해 1학기 자퇴 현황이 집계된다고 하는데, 학생이 학교 밖으로 내몰리는 일은 막아야 한다.
고교학점제는 교육 환경이 열악한 지역에 특히 불리하다. 이런 곳은 인구 감소로 학생 수가 줄고, 교사 역시 부족하다. 그런데도 과목 수를 늘리다 보니 교사 1명이 여러 과목을 맡는다. 학습의 질이 떨어진다. 반면 특목고는 교사 수가 일반고의 1.5배다. 훨씬 다양한 과목이 개설된다. 결국 특목고와 일반고, 특히 지역의 소규모 학교 간 격차는 더 벌어진다.
고교학점제는 원래 절대평가와 짝이 되는 제도다. 친구 성적과 무관하게 오로지 나의 성취로 평가받아야 과목 선택권이 보장될 수 있다. 그래서 선진국은 고교학점제와 절대평가를 함께 시행한다.
반면 한국은 내신 절대평가 반대 여론이 높다. 우수 학생이 몰리는 특목고가 유리해 일반고가 황폐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평가를 유지하는 한, 고교학점제는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없다. 특히 올해 고1 학생은 내년에 융합·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더 많은 선택과목을 마주해야 한다. 혼란은 더 커질 것이다. 과목 선택권은 사라지고 부작용이 속출한다면 굳이 학점제를 고집할 이유가 무엇인가. 좌·우파 교육단체도 한목소리로 반대한다. 입시 지옥에 학점제 지옥까지 얹는 건 학생에게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이다.
[김인수 논설위원]

매일경제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