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표현주의 거장 바젤리츠 회고전
화면 분할한 '절편 회화'
타계 직전 그린 황금빛 연작
시그니처 '거꾸로 그림'까지
회화·조각·드로잉 46점 전시
"소파 위 장식품은 원치 않아"
거대 화폭에 담은 60년 미학
서울 세화미술관서 연말까지
화면 분할한 '절편 회화'
타계 직전 그린 황금빛 연작
시그니처 '거꾸로 그림'까지
회화·조각·드로잉 46점 전시
"소파 위 장식품은 원치 않아"
거대 화폭에 담은 60년 미학
서울 세화미술관서 연말까지
화면 속 거꾸로 선 채 추락하는 듯한 인체 형상은 노년에 접어들어 늙고 병들어가는 바젤리츠가 그린 누드 자화상이다. 올해 4월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난 그의 회고전이 지난 13일부터 흥국생명 2·3층에 위치한 세화미술관에서 열리는 것도 이렇듯 오랜 인연에서 비롯됐다. 태광그룹 세화예술문화재단은 국내에서 바젤리츠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기관 중 하나로 유명하다. 이번 회고전에 나온 회화와 조각, 드로잉 등 46점 가운데 재단 소장품이 무려 10점이다. 바젤리츠 작품은 점당 30억~50억원에 이르며 전시 보험가액은 1500억원에 달한다.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바젤리츠가 떠난 지 100여 일이 지난 현재 전 세계 10여 군데서 바젤리츠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한창인 이탈리아 베네치아 한 섬에서도 바젤리츠 황금 페인팅 말년작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1960년대작부터 타계 직전 그린 작품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회고전은 그의 작고 이후 세화미술관이 처음이다.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전시가 작가의 타계로 유작전이 된 것이다. 미술관에서는 타계 3주 전 인터뷰한 20여 분짜리 영상이 흐른다. 바젤리츠는 당시 "한국 사람들이 제 작업에 놀라거나 흥미를 느낄지 궁금하다"며 "한국의 그림은 이제 유럽 회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시는 가장 이른 작품이 포문을 열지만 엄격한 연대기 순은 아니다. 가장 먼저 관람객의 눈을 휘어잡는 작품은 1966년작 '나뉜 소 두 마리 I'이다. 제목 그대로 소 두 마리를 그렸는데 화면이 가로선으로 잘려 있어 코 부분이 어긋나 있다. 위아래나 좌우를 어긋나게 배치한 '절편 회화' 연작 중 초기작이다. 그 옆에 걸린 '손가락 그림-날개'는 1972년작으로 독수리를 파편화된 '날개'로 단순화한 작품이다. 이렇듯 작가는 독일의 영웅주의적 상징들을 해체하고 파편화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짊어진 멍에를 시각화했다. 무너진 독일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분절된 형태로 은유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1969년 그의 시그니처가 된 '거꾸로 뒤집는 회화'가 탄생하는 모태가 된다.
거장은 왜 그림을 뒤집기 시작했을까.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기존의 규칙과 맹목적 추종을 타파하려 했다"며 "그러고 나니 상하좌우의 방향성이란 게 대단히 자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바닥에 눕힌 채 그림을 그리면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고 머리와 몸통 팔 다리의 위계가 사라지게 된다. 그는 더 나아가 "아이들에게 할머니를 그려보라고 시키면 거의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린다. 아이들은 비례나 방향 따위를 모르니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또는 나름의 방식으로 할머니를 그리기 시작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뮤즈는 아내 엘케다. 두 번째 방에 이르면 2019년 '프랑스에서의 엘케 II' 연작이 사방의 벽을 가득 메운다. 초창기 그는 두껍게 캔버스 위에 물감을 쌓아올렸지만 노년에 접어들어 물성이 현저히 옅어지고 투명해진다. 2025년작인 '그 시절의 토착 예술'은 생의 말년에 이르러 엘케와 자신을 함께 담아낸 이중 초상화 연작이다. 둘 사이에 그려진 앙상한 침대 프레임은 죽음으로 성큼 다가선 노년의 고독과 삶의 유한함을 응시한다.
작품은 미술관 천장까지 높일 정도로 대형 회화들이 대부분이다. 작가는 "너무 커서 전시나 판매가 거의 불가능해 독일에서는 허세를 부린다고 했지만 이른바 거실에 거는 '소파 그림'이 되길 원치 않았다"며 "덜 관습적이고 더 공격적인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고 토로했다.
◆ 거장에게 발과 다리란…불안한 자아 상징
3층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2000년대 이후 과거 작품을 다시 해석한 '리믹스' 연작이 눈에 들어온다. 제복 차림의 남성에게 프리다 칼로 나무 의족을 암시하는 여성용 구두를 신겼는데, 이는 전후 독일의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인물을 표현했다.
이처럼 바젤리츠의 작품에선 발과 구두가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붕대를 감고 있거나, 부서지고, 잘려 나간 듯이 묘사된다. 이는 사람이 땅이라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환기시킨다.
그는 "우리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사가 아니다. 대지 위에 똑바로 서서 살아가는 북방(독일)의 존재들일 뿐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거꾸로 회화'는 다리와 구두의 위치 또한 위로 향하게 한다. 발의 위상을 머리 부분으로 격상시키는 동시에 대지에서 떨어져 허공을 향해 붕 떠 있게 만든다. 방향성을 잃고 허공에 발을 구르는 현대인의 위태로운 초상이 이 반전의 미학을 통해 절묘하게 표현된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달 전에 그린 2026년작 황금빛 연작 '그보다 더'다. 신성함과 영원성, 초월을 상징해온 금빛 위에 그가 그린 것은 가늘고 희미한 인간의 몸이다. 한없이 연약하기에 더 영적으로 다가오는 인간의 모습을 숭고하게 표현한 역작이다. 전시는 12월 27일까지. 일반 관람료 1만5000원.
[이향휘 선임기자]

매일경제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