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 무전기 개발하던 공고생
첨단 전자소재 기업 키워내
ACF 넘어 반도체 소재 도전
“한국의 3M 만들겠다” 포부
지난 11일 점심 서울 중구의 한 중식당. 작은 체구의 김정희 에이치엔에스하이텍 회장(대표이사)이 짙은 파란색 운동화에 흰색 반팔 티셔츠, 검은색 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오른손에는 자그마한 검은색 가죽 가방이 들려 있다. 언뜻 보면 동네시장에서 종종 마주칠 법한 평범한 장년의 남성이었다.
그러나 짧은 인사 후 이야기 화제가 기술과 회사로 넘어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군용 무전기부터 첨단 전자소재, 반도체 패키징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까지 40년 가까운 전자산업 이야기가 쉼 없이 쏟아졌다. 특히 “한국의 3M을 만들겠다”고 말할 때 그의 눈빛은 유난히 반짝였다.
김 회장의 최종 학력은 영등포공고 졸업이다. 대학은 가지 않았다. 대신 공장으로 갔다.
1963년생인 그는 영등포공고를 졸업한 뒤 광림전자에 개발자로 취직했다. 당시 참여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군용 무전기 국산화였다. 무전기를 소형화하는 데 필요한 하이브리드 집적회로(IC) 모듈 8개 가운데 7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대학 강의실 대신 공장에서 회로와 부품을 만지며 전자산업을 배운 셈이다.
회사에서 대학 진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회장의 선택은 달랐다. 대학에 가는 대신 당시 막 등장하기 시작한 소프트웨어를 배우겠다며 전산학원을 다녔다.
이후 스위스계 무역회사로 옮겨 해외 첨단 장비를 국내에 들여오는 컨설팅 엔지니어로 일했다. 공장 안에서 기술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기술과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이 경험은 지금의 에이치엔에스하이텍을 키우는 밑거름이 됐다. 좋은 소재를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제품을 만들 수 없고, 이를 대량 생산하는 장비까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이때 자리 잡았다.
김 회장이 2005년 에이치엔에스하이텍 대표이사로 취임했을 당시 회사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김 회장에 따르면 연간 매출이 1억원에도 못 미쳤지만 한 달 급여로 약 5억원이 나갈 정도였다. 기술 개발과 생산라인 구축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갔지만 정작 이를 돈 버는 사업으로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김 회장은 회사가 보유한 기술 가운데 이방성전도필름(ACF)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ACF는 쉽게 말해 ‘초미세 전자부품용 접착 필름’이다. 필름 안에 전기가 통하는 미세 입자를 넣어 전극끼리 붙이는 동시에 전기 신호까지 전달한다. 전자제품이 작아지고 전극 사이 간격이 좁아지면서 기존 납땜 방식으로 연결하기 어려운 부품을 붙이는 데 쓰인다.
당시 이 시장은 일본 업체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선택과 집중에 나섰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ACF에는 힘을 싣고, 대규모 추가 투자가 필요한 사업은 정리했다.
대표적인 것이 웨이퍼 사업이었다. 김 회장에 따르면 2007년 미국 업체를 통해 인텔에 공급할 제품 승인까지 받았지만 본격적인 양산을 위해서는 다시 수백억원을 투자해야 했다. 결국 관련 기술과 인력·설비를 삼성전기에 넘기고 ACF에 집중하는 길을 택했다.
이후 에이치엔에스하이텍은 ACF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2012년 이그잭스 ACF사업부, 2013년 LG이노텍 ACF사업부를 잇달아 인수하며 기술과 사업 기반도 넓혔다.
문제는 좋은 소재 하나를 개발했다고 사업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ACF의 적용 범위를 반도체 등으로 넓히려면 수㎛(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미세한 도전 입자를 필름 위 원하는 위치에 정밀하게 배열해야 한다. 실험실에서 샘플 몇 장을 만드는 것과 공장에서 수없이 찍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특히, 이를 대량 생산할 장비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김 회장은 결국 장비까지 직접 만들기로 했다. “기계를 만들었다가 부수고,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최근 수년간 관련 기술과 생산 장비 개발에 수백억원을 쏟아부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회사가 사용하는 핵심 생산 장비 상당 부분도 자체 설계·국산화했다.
김 회장은 “그 돈을 연구개발에 쓰지 않았다면 당장 회사 이익은 훨씬 많이 났을 것”이라며 “하지만 샘플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양산할 장비가 없으면 결국 제품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대학 대신 공장에서 기계를 만졌던 젊은 엔지니어의 경험이 수십 년 뒤 첨단 전자소재의 양산 기술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쓴맛도 많이 봤다. 김 회장은 과거 파워인덕터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기술 개발과 설비 투자 등으로 약 250억원의 손실을 봤다고 했다. 회사의 상장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그는 이 실패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그때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회사가 제품으로 말하지 않으면 언제든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요.”
이 경험은 지금의 경영 철학으로 이어졌다. “엔지니어는 데이터로 말하고 회사는 제품으로 말합니다.”
연구개발 성과를 말로 포장하기보다 숫자와 데이터로 증명하고, 기업의 경쟁력은 결국 고객이 선택하고 시장에서 팔리는 제품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김 회장이 신사업을 바라보는 기준도 같다. ‘기술이 있다’는 말보다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 대량 생산할 수 있는지를 따진다.
이제 김 회장의 시선은 ACF 너머를 향하고 있다. 에이치엔에스하이텍은 ACF에서 축적한 초미세 접합 기술을 반도체 패키징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다. 미세 입자를 정밀하게 배열하는 기술을 활용한 반도체 테스트 소켓을 비롯해 반도체 칩이 올라가는 기판의 절연재인 ABF 계열 소재, 여러 개의 칩을 쌓을 때 접착과 절연 역할을 하는 NCF 등 반도체 패키징용 소재를 연구하고 있다.
일부 제품은 고객사 테스트 단계에 들어갔다는 게 김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다만 신사업을 서두르지는 않는다고 했다. 첨단 소재가 고객사 테스트를 거쳐 실제 양산과 매출로 이어지기까지 통상 3~5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당장의 실적보다 몇 년 뒤 팔릴 제품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취지다.
AI 데이터센터 시장도 새로운 먹거리로 보고 있다. 회사가 보유한 크리스털 오실레이터(회로에서 전기신호를 생성하는 부품) 기술을 기반으로 데이터센터 연결 분야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김 회장이 제시한 성장 목표는 올해 매출 1000억원 돌파, 내년 1300억원, 향후 5년 안에 3000억원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고 있는 회사의 최종 모습은 단순한 ‘매출 3000억원 기업’이 아니다.
김 회장이 인터뷰 내내 여러 차례 꺼낸 회사가 미국의 소재·과학 기업 3M이다.
3M이 접착제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필름과 연마재, 전자소재 등 수많은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냈듯 에이치엔에스하이텍도 ‘접합’이라는 핵심 기술을 기반으로 전자·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새로운 소재를 끊임없이 내놓는 회사가 되겠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품이 확실히 좋으면 결국 기회는 옵니다.”
공고를 졸업하고 대학 대신 공장으로 향했던 젊은 엔지니어는 그렇게 40년 가까이 전자산업 현장을 지켰다. 군용 무전기 부품을 만들던 손으로 일본 기업들이 장악한 첨단 전자소재에 도전했고, 이제는 반도체와 AI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소재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가 꿈꾸는 회사는 한국의 3M이다.
그 꿈을 이루는 방법을 묻자 돌아온 답은 40년 전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단순했다. “엔지니어는 데이터로 말하고, 회사는 제품으로 말하면 됩니다.”
■에이치엔에스하이텍은…
디스플레이 본딩 전문에서 반도체 패키징 소재 업체로 탈바꿈하고 있는 에이치엔에스하이텍은 대전에 본사를 둔 코스닥 상장 중소기업이다. 올해 상반기 시장 기대치를 웃도는 호실적을 기록하며 창립 이래 처음으로 매출 1000억원 돌파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지난 2024년 10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에이치엔에스하이텍은 ACF와 크리스탈 오실레이터 부문 모두에서 차별화된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주력 제품인 ACF는 각종 디스플레이나 모바일 카메라 모듈 등 미세한 전자 부품들을 정밀하게 연결해 주는 초정밀 접합 소재로 IT기기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소재다. 현재 국내 1위, 글로벌 2위를 달리고 있다.

매일경제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