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일본 정부가 엔저(엔화 가치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15년 만에 공동 개입에 나서며 글로벌 금융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벼랑 끝에 몰린 엔화를 구출하기 위한 공동 작전인데, 엔저 탈피를 넘어 양국의 이해관계가 철저히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美·日 15년 만에 ‘엔화 공동 방어’
베선트 재무장관 “엔 50억~100억달러 매입”
로이터통신은 지난 7월 31일, 미국 메릴랜드주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연방정부 각료회의 도중,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의 자리에 놓인 메모지를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이를 두고 미국 재무부가 일본 엔화 약세를 막기 위해 개입한 정황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메모지에는 ‘할 일(To Do)’이라는 제목 아래 ‘일본 엔(JPY) 매입 50억~100억달러’라고 적혀 있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소식통을 인용해 외환 시장에서 미 재무부 개입이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번 조치에 대해 “(일본과의) 우정의 신호”라며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도 외환 시장에 개입했다. 시장에선 7월 30일 하루에만 6조~7조엔이 투입된 것으로 본다. 31일에도 추가 개입이 이뤄져 이틀간 최소 10조엔 이상이 집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일본은 지난 4~5월에도 11조7000억엔 규모의 외환 시장 개입에 나섰다. 이를 합치면 최근 투입된 자금만 20조엔이 넘는다. 연간 기준 역대 최대였던 2024년 15조3000억엔을 이미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는 미국과의 환율 공조를 공식화했다.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은 8월 3일 담화를 통해 “미국과 공동으로 엔화 매수 개입을 실시했다”며 “앞으로 (미국과) 추가 공동 개입에 주저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미일 공동 개입은 지난 5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양국 재무장관 회담에서 양국이 조율한 데 따른 결과란 후문이다. 지난 7월 말, 엔·달러 환율이 최고 164엔에 육박해 엔화 가치가 약 40년 만의 최저치로 떨어지자 두 나라가 공조해 외환 시장 개입에 나섰다는 의미다.
이 여파로 엔화 환율은 요동쳤다. 지난 7월 30일 밤부터 8월 1일 새벽까지 5~6차례 미일 당국 개입으로 추정되는 엔화 매수에 급락세를 보였다. 달러당 엔화 환율은 7월 30일 163엔대에서 8월 1일 157엔대로 3% 넘게 급락했다.
미일 양국이 외환 공조에 나선 것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갑작스러운 엔고를 막기 위해 개입한 이후 15년 만이다. 당시에는 주요 7개국(G7)과 공동으로 대지진으로 인한 엔화 가치 급등에 대응하기 위한 개입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40여년 만의 엔저를 저지하기 위한 공조란 점에서 이례적이란 평가다.
美·日 전격 공조 배경은
美 국채 매도 막고 강달러 유지 목적
미국과 일본이 이례적인 공조에 나선 배경은 뭘까.
첫째 미국 국채 방어를 위한 목적이 크다.
보통 일본 정부는 엔화를 방어하기 위해 외환 자산을 팔고 엔화를 매입한다. 일본의 외화보유액 상당 규모는 미국 국채다. 일본은 지난 5월 말 기준 약 1조1400억달러의 미국 국채를 보유한 최대 해외 보유국이다.
일본이 미국 국채를 매각하면 미국의 국채 금리 상승 압력이 커진다. 미 국채 금리 상승은 미국 정부 이자 부담을 키우고 미국 경제와 증시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주택담보대출, 기업대출 등 미국 경제 전반의 자금 조달 비용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장기 금리가 오를수록 가계와 기업 이자 부담도 커진다.
최근 미국 국채 금리는 19년 만의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최근 4.65% 안팎을 기록 중이고,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지난 7월 31일 5.27%까지 올라 2007년 7월 이후 약 1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앞서 7월 29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이후 케빈 워시 연준 의장이 향후 금리 경로에 대한 구체적인 신호를 내놓지 않자 장기 금리가 치솟았다. 미국 입장에선 공조 개입 효과를 극대화해 일본이 미국 국채를 매도해야 할 필요성을 줄이고, 미국 국채 수요를 강화하는 효과를 노렸다는 의미다.
일본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달러당 엔화값이 한때 164엔에 육박하는 등 40여년 만의 기록적인 엔저로 수입물가와 생활물가가 치솟아 더 이상 이를 방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일 양국의 이해관계가 철저히 맞아떨어졌다는 의미다.
양국은 일본이 시장 개입을 위한 달러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외국 통화당국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FIMA(해외·국제통화당국, Foreign and International Monetary Authorities)’ 레포 한도 확대도 검토 중이다. FIMA 레포는 각국 외환당국이 뉴욕연방은행에 예치한 미국 국채를 담보로 최대 600억달러(약 9조5000억엔)를 조달할 수 있는 제도다. FIMA를 활용하면 미국 국채를 팔지 않고 담보로 달러를 조달해, 미국 국채 매도가 장기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
둘째 강달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미국 재무부의 이번 현물 시장 개입은 이례적으로 달러가 아닌 유로화를 팔아 엔화를 사는 방식을 활용했다. 달러를 매각할 경우 달러 가치가 약화될 뿐만 아니라 베선트 장관이 추구하는 강달러 정책이 훼손됐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엔화 매수 개입이 달러 약세 신호로 보이지 않기 위한 목적이란 분석이다. JP모건은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강한 달러’를 표방하는 상황에서 약달러 시그널을 주고 싶지 않았거나, 달러 약세를 촉발할 잠재적 위험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차영후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이 달러가 아닌 유로를 매도해 엔화를 매수했는데, 달러 약세를 유도하지 않으면서 국채 시장 안정을 도모하려는 성격이 강했다”고 진단했다.
셋째 위안화 매도 차단 효과다.
미국 재무부가 달러 매도가 아닌 유로화 매도를 선택한 데는 중국 외환당국의 위안화 매도 개입을 막기 위한 목적도 깔려 있다는 관측이다. 노무라증권은 “미국의 자국 통화(달러) 매도 개입이 중국으로 하여금 위안화 매도 개입 명분으로 사용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특히 이번 개입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다급함이 반영된 조치란 분석이 나온다. 금리 상승으로 주택담보대출 보유자의 어려움이 커지는 것을 막아 표심을 가져오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미일의 외환 시장 개입만으론 엔저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다고 본다. 엔화 약세 압력의 근본 원인은 과도한 일본 정부 부채인 만큼 구조적 요인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번 개입은 단기적인 효과에 그칠 것이란 우려다. 일본은행의 추가 금리 인상과 함께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의 재정 정책 등에 구조적인 변화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진경 신한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과거 사례를 보면 정부의 대규모 개입에도 구조적 금리 요인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6개월 내 효과가 소진되고, 엔화는 다시 신저점을 향해 움직였다”며 “이번 개입은 추세 전환보다는 시간 벌기 성격에 가깝다. 추세적 전환을 위해서는 일본은행의 추가 금리 인상과 미 연준 긴축 완화에 따른 금리차 축소가 필요하다”고 전망했다.
국내외 금융 시장 영향은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 빠져나갈 수도
미국과 일본의 시장 개입으로 엔화 가치가 높아질 가능성이 커지자 시장의 관심은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여부로 쏠린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미국 국채와 주식, 신흥국 채권 등 수익률 높은 자산에 투자하는 거래다. 엔화는 오랜 기간 캐리 트레이드의 펀딩 통화 역할을 해왔고, 글로벌 위험자산의 주요 유동성 공급원 중 하나였다.
엔화가 약세를 보이면 투자 수익과 환차익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다. 반대로 엔화 가치가 오르면 빌린 엔화를 갚는 비용이 늘어난다. 빌린 엔화를 상환하기 위해 해외 자산을 매도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엔화 약세 지속’이란 전제가 흔들리면 투자자들은 엔화를 통해 투자했던 위험자산을 매도해 엔 캐리 흐름을 되돌릴 가능성이 커진다. 글로벌 리서치 기관 BCA리서치는 보고서에서 “엔 캐리 트레이드는 ‘시한폭탄’ ”이라며 “엔화가 급격히 반등하거나 글로벌 위험자산이 급락할 경우 대규모 청산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변수는 엔 캐리 자금이 어디에 집중됐는지 여부다. 시장에선 상당 부분 빅테크·인공지능(AI) 등 미국 기술주에 투자됐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엔 캐리 트레이드가 급격하게 청산되면 국내외 금융 시장에도 파편이 튈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속도에 따라 글로벌 자금 시장 향방이 엇갈릴 전망이다. 만약 일본이 금리를 급격히 올릴 경우, 저렴한 엔화를 빌려 미국과 한국 증시 등에 투자했던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대거 청산되며 국내 증시에 충격을 줄 수 있다.
반대로 금리를 올리지 않아 엔저가 길어지면 원화, 위안화 등 아시아 주요 통화의 동반 약세가 불가피하다. 최근 원화와 엔화의 동조화(커플링) 현상이 뚜렷해진 만큼, 시장에서는 엔화 가치의 완만한 상승을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로 꼽는다. 이때 원화 가치 안정은 물론 국내 증시로의 외국인 투자 자금 유입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증시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박상현 iM증권 애널리스트는 “2024년 당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리스크가 불거졌던 것은 일본은행의 기습적인 금리 인상과 미국 경기 침체 우려가 동시에 작용했기 때문”이라며 “현재 일본의 추가 금리 인상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이벤트고, 미국 경제도 견조한 확장세라 일본계 자금이 미국 자산 시장에서 급격히 이탈할 여지는 크지 않다”고 진단했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73호(2026.08.19~08.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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