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정상급 아트·컬처 매거진 ‘컬처드(Cultured)’가 지난 7월 ‘올해의 영 컬렉터’로 선정한 애니 테일러(Annie Taylor)는 현재 뉴욕 아트신을 이끄는 가장 감각적이고 영향력 있는 아이콘이다. 브롱크스 미술관(Bronx Museum of the Arts) 이사이자 작품수집위원회 위원, 브루클린 미술관 자문위원회 공동의장으로서 주요 미술 기관의 핵심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동시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아폴로 서클(The Apollo Circle) 공동의장도 맡고 있다. 20~30대 젊은 예술 후원자들로 구성된 아폴로 서클은 뉴욕 미술계에서 ‘차세대 문화 리더’들의 역동적인 모임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뉴욕 토박이인 31세 애니 테일러의 다양한 활동들은 전통적인 미술관 후원을 넘는 문화적 연대와 새로운 컬렉팅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녀는 작품 구입자와 컬렉터를 예리하게 구분한다.
“컬렉터는 작품을 사서 단순히 벽을 채우는 단계를 넘어선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 작품과 함께 살고, 계속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싶어서 매번 작품을 소장하죠. 수집은 하나의 교육이라 할 수 있어요. 작가, 역사, 정치, 정체성, 문화에 대한 대화를 촉발시키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지금과는 ‘다르게’ 사고하도록 자극합니다. 가장 큰 보상은 소유가 아니라 작품과 평생에 걸쳐 발전시켜나가는 ‘관계’거든요.”
그녀를 진정한 컬렉터로 변화시킨 첫 작품은 브라질 작가 카이오 마르콜리니(Caio Marcolini)의 1000달러짜리 작은 벽 조각이었다. 얇은 금속실을 손으로 일일이 엮어, 마치 세포가 증식하듯 공간을 유연하게 파고드는 이 작품은, 그녀가 예술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놨다. 작품과의 진짜 관계는 갤러리를 떠난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걸, 그녀는 그때 깨달았다. 그 조각은 지금도 그녀의 아파트에 걸려, 왜 수집을 시작했는지를 매일 상기시켜 준다. 지금까지 60여점을 소장한 그녀는 한 번도 구매를 후회한 적이 없지만, 2년 전 멜리사 조지프(Melissa Joseph)의 작품을 놓친 것만큼은 두고두고 아쉽다.
“충동구매를 유발할 수 있어 경매는 가급적 피하려고 하고 있어요. 면밀히 관찰해온 작가의 활동을 서로 공유하고, 작품을 소장할 때마다 알려주는 4명의 단톡방이 있는데, 거기에 ‘6개월 뒤에 확 뜰 작품’ 같은 얘기는 올라온 적이 없어요. 엄격한 기준을 세워두고 모으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반복적으로 저를 끌어당기는 테마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인간의 형상, 여성의 재생력, 취약함, 그리고 조용한 연결의 순간들이요. 그런 작품들과 한 공간에 살다 보니, 제 컬렉션이 결국 제 삶의 가장 소중한 관계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남편, 친한 친구들, 그리고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작가 커뮤니티요. 컬렉팅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겐 늘 얘기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바라보고 싶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만 사세요. 시장이나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작품을 사라고 압박해도 절대 휘둘리지 마세요. 자신의 취향을 믿으세요. 당신의 안목이야말로 컬렉터로서 개발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자산입니다.’ ”
대대로 미술품을 수집해온 집안의 딸처럼 보이는 애니 테일러. 하지만 그녀가 오히려 부모님을 미술의 세계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에, 그리고 경매장 뒤편과 물류창고까지 경험한 실무형 컬렉터라는 이력에,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필립스 경매에서는 최고운영책임자의 인턴으로 일하며 고객 서비스부터 운송, 설치까지 경매 운영의 이면을 배웠고, 중견 경매 회사인 도일(Doyle)에서는 입찰과 고객 서비스를, 세계 최대 규모의 스코프 아트쇼(SCOPE)에서는 전시 업체 관리와 계약 협상을 익히며 창립자와 함께 도시마다 열리는 페어의 방향을 그려나갔다. 이후 에트나 파인 아트 로지스틱스(Aetna Fine Art Logistics)에서 아트페어·전시 부서를 이끌며 갤러리, 컬렉터, 미술관을 위한 복잡한 국제 운송까지 관리했다. 물류는 화려한 영역은 아니지만, 전시가 성사되기까지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존중을 갖게 해준 계기였다. 이 모든 경험은 오늘날 그녀가 예술기관을 운영·전략 양쪽에서 이해하는 자양분이 됐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양분을 고스란히 미술관에 되돌려주기 시작했다. 개인소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술관에 기증하기 위해 작품을 고르게 된 것이다.
뉴욕도 문화 없다면 금융 지옥에 불과
젊은 세대가 누릴 문화 예술 존재는 필수
“브롱크스 미술관의 작품수집위원회에 합류한 것이 컬렉팅에 대한 제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미술관이 어떻게 소장품을 구축하고, 작가를 지원하며, 지역사회에 기여하는지를 직접 목격했거든요. 컬렉팅이 자신의 벽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문화적 유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후 저는 독자적으로 신진 여성 작가 세 명의 작품을 브롱크스 미술관에 기증했고, 가족 재단을 통해 질 프레스(Gilles Peress)의 ‘First Day’를 브루클린 미술관에 공동 기증했으며, 다이 한(Dayi Han)의 작품 여섯 점의 소장을 성사시키는 데도 힘을 보탰어요. 미술관 소장품을 통해 작가들을 지원하는 것은, 개인 컬렉터 한 명이 가닿을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규모의 관객에게 가닿게 합니다. 컬렉팅의 가장 보람 있는 부분 중 하나고, 평생 이어가고 싶은 일입니다.”
예술 외에 유일하게 그녀가 수집하는 것은 빈티지 의류다. 가장 사랑하는 아이템은 1990년대 초반의, 흠 하나 없는 입생로랑 슈트다. 뛰어난 디자인과 장인정신, 그녀만의 개성까지 담긴 이 슈트를 입고 지난해 메트로폴리탄 아폴로 서클 자선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애 작품을 묻자, 절대 하나를 고를 수 없다며 ‘마치 아이 중 하나를 편애하는 것’과 같다고 대답하는 그녀에게, 빠르게 성장 중인 서울의 예술 생태계에 대해 물었다.
“뉴욕도 문화가 없다면 금융 지옥에 불과해요. 도시에 영혼을 주는 건 미술관, 갤러리, 예술가, 식당, 공연장, 창작커뮤니티죠. 위대한 도시엔 반드시 문화가 있어야 합니다. 제 생각엔 문화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일이 소수 특권층만의 몫이 아니라는 걸 ‘젊은 세대’에게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해요. 컬렉팅이든 자원봉사든, 그냥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이든, 어떤 참여든 다 의미가 있어요. 저는 늘 말해요. ‘관심을 갖는 건 멋진 일이다.’ ”
컬렉팅은 단순히 아름다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넘어 작가를 지원하고, 미술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미래 세대가 누릴 문화를 미리 심는 일로 진화 중이다. 뉴욕이 여전히 생동감으로 가득 찬 이유는 현대미술사를 함께 써나가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애니 테일러 같은 차세대 컬렉터들 덕분 아닐까.
[김지은 방송인·<디어 컬렉터> 저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73호(2026.08.19~08.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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