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경제

“하다하다 대출까지 오픈런” 선착순 경쟁에 실수요자 ‘발동동’

배윤경 기자
입력 : 
2026-08-11 08:42:03
은행권 가계대출 조이기 한여름부터 본격화
주담대 ‘오픈런’에 고신용자까지 2금융권으로
연합뉴스

“첫날 대출 신청에 실패해 이틀째엔 연차까지 냈습니다. 대출받을 능력이 없어 거절당한 것도 아닌데 신청 시간까지 따져야 하는 상황이 답답하네요.”

조만간 주택 잔금을 치러야 하는 직장인 A씨는 이번 주 하루를 통째로 비웠다. 인터넷전문은행의 주택담보대출(주담대) 접수가 시작되는 오전 6시에 맞춰 새벽부터 대기하는 이른바 ‘오픈런’에 나서기 위해서다. 앞서 주거래은행에서는 대출 한도가 소진됐다는 답변을 들었고, 다른 은행에서도 신규 접수 자체가 제한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A씨의 소득과 신용점수, 담보가치를 고려하면 통상 대출 심사를 받는 데 큰 문제가 없는 조건이지만, 지금은 심사받을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상황이다.

은행권 대출 문턱이 예년보다 일찍 높아지면서 주택을 사려는 실수요자들의 자금 조달에 비상이 걸렸다. 과거엔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대출 한도가 줄어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올해는 한여름부터 은행들이 주담대 한도를 줄이고 신규 취급을 중단하는 등 선제적인 대출 관리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대출 심사에서 상환 능력을 따지기도 전에 ‘은행에 남은 한도’가 대출 가능 여부를 가르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가계대출 증가액은 지난달 말 기준 6조3821억원으로 집계돼 올해 금융당국에 제출한 연간 목표치인 4조3363억원을 이미 넘어섰다.

지난해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증가액 목표는 8조690억원이었지만 올해는 절반 수준까지 축소됐다. 은행으로서는 대출을 늘릴 수 있는 여유가 지난해보다 절반 가까이 줄어든 셈이다. 대출 공급 속도를 낮출 수밖에 없다.

연합뉴스

은행들이 내놓은 조치는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수도권과 규제지역의 주택 구매 목적 주담대 한도를 기존 6억원에서 3억원으로 낮췄다. 우리은행은 영업점별 주담대 월 취급 한도를 30억원에서 10억원으로 축소했다. 하나은행은 변동금리 주담대 신규 취급을 대면과 비대면 모두 중단하는 조치를 내놨다.

신한은행과 NH농협은행도 대출 모집인을 통한 주담대 신규 접수 등을 한시 중단했고, 5대 시중은행 모두 모기지보험 가입을 제한해 대출받을 수 있는 ‘통로’ 역시 좁아졌다. 주담대 자체의 한도가 줄어드는 데 더해 부대적인 대출 조건까지 강화되면서 차주가 실제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줄어들었다.

대출을 구하기 어려워진 실수요자들이 몰린 곳은 인터넷전문은행이다. 시중은행보다 비대면 신청이 편리하고 상대적으로 대출 공급 여력이 남아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카카오뱅크는 주담대 하루 접수 한도를 운영하는데, 최근 오전 6시 접수가 시작된 뒤 오전 중 물량이 모두 소진돼 오픈런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인터넷전문은행이 무한정 대출을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카오뱅크가 정책대출을 제외하고 금융당국에 제시한 올해 가계대출 증가 목표액은 3965억원이다. 주담대 잔액도 올해 약 3000억원 늘어나면서 총량 관리 부담이 커지고 있다. 결국 시중은행에서 시작된 대출 조이기가 인터넷전문은행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대출 시장의 풍선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은행에서 밀려난 고신용자들이 인터넷전문은행과 저축은행, 카드사 등으로 이동하면서다. 지난 6월 5대 은행 신용대출 이용자의 평균 신용점수는 926.2점으로 두 달 전보다 11점 높아졌다. 마이너스통장 이용자의 평균 신용점수도 같은 기간 958.8점에서 926.6점으로 올라 역대 최고 수준을 보였다.

이에 따라 2금융권으로 이동하는 고신용자도 늘어 대출 핀다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신용점수 900점 이상 차주의 2금융권 대출 건수는 831건으로 전 분기보다 20% 증가했다. 신용점수 1000점 만점자가 2금융권에서 대출받은 사례도 50건을 넘어섰다.

고신용자가 2금융권으로 내려가면 기존에 저축은행이나 카드사 등을 이용하던 중·저신용자의 자금줄이 더 좁아질 수 있다. 고신용자가 인터넷전문은행과 저축은행 등으로 이동하는 ‘연쇄 이동’으로 금융시장 내 차주 간 대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 아파트 전경. 연합뉴스

이 와중에 주택을 사려는 수요가 줄지 않는다는 점은 또 다른 부담이다. 한국은행의 7월 소비자동향조사에서 주택가격전망 소비자동향지수(CSI)는 127로 전월 대비 7포인트 상승했다. 이는 2021년 9월(128) 이후 4년 10개월 만의 최고치다. 대출 공급은 줄어드는데 주택가격에 대한 기대와 자금 수요는 오히려 커지고 있는 셈이다.

대출 수요가 이어지는 가운데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예비입주자 등 실수요자의 자금 조달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 역시 나온다. 실제 가계대출을 강하게 조였던 2021년에도 하반기 ‘대출 절벽’으로 잔금대출을 받지 못하는 실수요자가 늘자 정부가 예외 조치를 내놓은 바 있다. 현재 금융당국도 잔금대출을 중심으로 대책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2021년에도 금융당국이 전세대출과 잔금대출에 예외를 두는 조치를 내놨다”면서 “가계부채 관리를 위해 대출 총량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이미 주택 매매계약을 체결한 실수요자까지 신청 시점이나 은행별 잔여 한도에 따라 대출 가능 여부가 갈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만큼 별도의 관리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